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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 대전은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과 장기간에 걸친 긴장이 합져서서 발생한 인류의 역사상 가장 참혹하고 파괴적인 전쟁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다시는 이러한 비극적인 세계 대전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국제적 합의와 협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 줍니다. 이번에는 당시 2차 대전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그 이후에 경제, 사회적인 재건 과정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2차 대전의 원인과 배경베르사유 조약 이후의 불만
1차 세계 대전 이후 1919년 맺어진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서 독일은 영토적인 큰 손실과 전쟁에 대한 배상금 지급 등 독일 입장에서 불리한 조건을 강요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독일 내에는 심각한 경제적 고통과 국민적 분노가 점점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은 1919년 6월 28일, 프랑스 파리 인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체결된 조약입니다. 이는 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약 7개월간에 걸쳐 만들어진 파리 강화 회의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독일은 알사스-로렌 등의 지역을 프랑스에 다시 반환해야 했으며, 폴란드, 벨기에, 덴마크에도 영토를 조금씩 나누어주었습니다.
또한, 독일 군대는 육군 10만 명, 해군 1만 5천 명으로 제한되었고, 전차, 중포, 잠수함, 군용 항공기 보유가 전면 금지되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은 연합국에 대해 상당한 규모의 배상금을 지급하기로 하였으며, 이는 결국 독일 경제에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일이 전쟁 발생 책임의 주된 국가임을 명시하였습니다. 이 조항을 비롯하여 이로 인해 독일 내에는 심각한 경제적 고통과 국민적 분노가 점점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대공황과 국가주의 시작
1929년 발생한 미국의 대공황은 전 세계까지 연쇄되어 경제 불황을 초래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보호주의의 벽을 쌓으며 경제적인 블록을 형성했고, 미국은 불황의 수렁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로 뉴딜 정책을 전개했습니다. 한편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영토 확장에 몰두하는 파시즘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조치들은 당시 시대 상황에 따른 절박한 현실 대처였으나, 장기적으로는 또 다른 분쟁의 불씨를 지피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대공황이 불러온 경제 위기의 시작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오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과잉 생산, 소비의 비대칭, 부의 분배에 대한 불평등은 사회에 균열을 만들고, 마침내 이는 1929년의 뉴욕 증시 붕괴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크나큰 경제 위기가 사람들의 일상까지도 침체 시키는 동시에, 사람들의 국가주의적인 감정과 열망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국민들의 불안과 절망은 대안적 리더십에 대한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되었으며, 이는 국민국가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며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라는 구분을 뚜렷이 하게 되었습니다. 국가주의는 예술과 문화, 교육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한 사회의 정체성과 가치관에 변화에 심오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회 각 분야는 국가주의적 색채를 띠며, 내부의 결속력을 다지는 동시에 외부와의 경계를 명확히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강대국 간의 전략적 동맹 및 대립
국가주의를 추구하는 나라들의 전략적 동맹 형성이 점점 강화되었습니다. 독일의 나치와 이탈리아의 파시즘 정권, 일본의 군국주의 강화는 서로 동맹을 맺으며 세계 영향력 확대를 모색했습니다. 반면, 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 같은 열강들은 이에 맞서서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군사력을 강화했습니다. 이런 상반된 전략이 전 세계적 긴장을 높였습니다.
무력 충돌과 영토 문제
일본의 중국 만주 침공,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 등 강대국들의 영토 확장 정책은 세계 여러 지역 간의 충돌을 발생시켰습니다. 또한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 및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은 명백한 군사적 위협 행위로, 유럽의 안정을 위협했습니다.
폴란드 침공과 2차 세계 대전의 발발
1939년 8월 23일 독일과 소련 사이의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고,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이를 계기로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소련 역시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유럽 전역이 전쟁 시대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의 결과와 그 이후 패전국 재건 과정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 이 전쟁은 세계 질서를 다시 편성하고, 특히 유럽과 아시아의 패전국가에게는 심각한 폐허를 남겼습니다. 전쟁이 끝난 유럽 대륙은 경제적으로 완전한 폐허 상태였으며, 독일, 이탈리아와 같은 주된 패전국들은 무너진 산업 기반과 실업, 물가 상승 등 심각한 경제적 문제에 빠져버렸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패전국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복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생겼습니다. 싸움에서 패한 국가들은 전쟁 이 후 연합군이 정한 배상금 지불에 큰 부담을 느꼈습니다. 특히 독일에게 부과된 베르사유 조약 같은 강제적이고 일방적인 조치들은 독일 경제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하지만, 국가 재건을 위한 첫 걸음으로 경제적 불황 타개책에 필요한 외부 자원을 찾으려는 노력이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마셜 플랜이었습니다.
미국은 '마셜 플랜'이라는 경제 재건 프로그램을 통해 유럽 국가들에게 막대한 수준의 금융적인 지원을 제공했습니다. 이 플랜은 전쟁으로 황폐화된 유럽국가들이 경제를 재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특히 서독은 이 계획을 통해 놀라운 경제 부흥을 이루어 독일의 기적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태평양 전쟁의 패전국인 일본도 미국 마셜 플랜 프로그램의 도움과 강력한 지원 아래 빠르게 재건을 시작했습니다. 1950년대부터 시작된 일본의 경제 성장은 일본의 고도 성장으로 이어지며 세계 경제의 주요 국가로 떠오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일본은 특히 전기 전자와 자동차 산업 분야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두며, 전후 세계 경제 재건 및 발전의 모범 사례로 꼽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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